기타 | 독일 뮌헨 유대인 공동체, 정착 200주년 기념 축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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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1 | 작성일 | 15-06-29 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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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독일 유대인의 삶이쉬라엘 레빙어 랍비, “길고도 긴 여정이었다”
2006년에 뮌헨 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건축된 유대교 회당 ‘오헬-야곱 시나고그’ 전경. |
뮌헨의 성 야곱 광장에서 개최된 유대인 정착 200주년 기념 축제에는 회중 연설과 음악, 무용, 희극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고 정갈한 음식들이 제공됐다.
특히 뮌헨 시민들은 이날 하루 공개된 유대교 회당 ‘오헬-야곱 시나고그’ 입장을 위해 긴 줄로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인접한 유대 박물관에도 수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샬롯데 크노블로흐 바이에른 주 유대인 공동체 회장은 기념식 축사에서 “오늘은 위대한 날이다”면서, “특히 60여 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만으로 재출발했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지난 200년은 성공의 경험이다”고 감격해 했다.
200년 전인 1815년은 유대인 공동체가 바이에른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은 해로, 실제 유대인의 삶은 그보다도 500여 년 전인 12~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 유대인 이민자들이 뮌헨에 작은 기도소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유대인의 삶은 이후 상상하기 어려운 시련과 변화를 겪게 된다.
유대인 공동체는 14~15세기 무렵에 활발한 성장을 보였지만 이후 계속된 인종 폭동과 추방으로 인해 1715년 당시 유대인은 20여 명만 남게 됐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에 바이에른 정부는 법률을 개정해 1815년 비로소 공동체의 정식 허가를 받게 된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후 자신들의 공동묘지를 갖게 됐고 1824년에 도시 외곽에 최초의 회당을 짓게 됐으며 1882년에는 도시 중심가에 중앙 회당을 건축하게 된다. 유대인 공동체는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해 1910년 당시 뮌헨 인구의 2%인 1만 1천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홀로코스트’(유대어 ‘쇼아’)라는 또 다른 비극에 직면한다. 1938년 이른바 ‘깨진 유리창의 밤’이라 불린 사건 때 유대교 회당이 방화로 파괴됐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국외로 도피하거나 집단 수용소로 보내져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생존자 60여 명이 유대인 공동체를 다시 세우게 된다.
지난 2006년 유대인 공동체는 뮌헨 시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8년의 회당이 있던 자리인 성 야곱 광장에 유대교 회당과 공동체 센터, 박물관을 새로 건축했다. 이 외에도 유대인 공동체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간호학교, 청소년 문화 센터, 도서관 등을 건립해 운영 중이다. 현재 약 9500명의 유대인들이 뮌헨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구 소련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뮌헨 회당 책임자인 이쉬라엘 마이어 레빙어 수석 랍비는 “길고도 긴 여정이었다”면서, “이제 우리는 나치 테러 이전의 규모로 발전했으며 시내 중심가에서 유대인의 삶이 번성하게 돼 기쁘다”고 유대인 공동체 정착 200주년을 축하했다.
이날 축제에 참가한 뮌헨 시민들은 자신들의 선배 세대들이 저지른 참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공동체가 건재함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며,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도 다른 종교 공동체들과의 교류와 대화가 더 활발하게 펼쳐지길 기대했다.
뮌헨=로버트 벤텔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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